우리가 인간 지능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직업은 소셜 미디어 기업에서 인공 지능의 윤리 정책을 수립하는 일이다. 인공 지능이 제공해서는 안 되는 콘텐츠의 범위를 규정하고, 해당 콘텐츠가 생성될 수 없도록 인공 지능을 훈련하는 것이 주요 업무다. 무기 제조법, 욕설과 비방, 성범죄물 등 사회에 해와 악이 되는 콘텐츠는 너무 방대하고, 사기업이 검열 대상을 규정할 권한을 보유하는 것 자체가 아주 민감한 사항이므로, 임무가 막중하다.
최근에 자살과 정신 질환 관련 콘텐츠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유저가 인공지능 챗봇에 자살 방법을 문의할 때 챗봇은 첫째, 요구를 거절하고, 둘째, 해당 지역의 자살 예방 핫라인을 제공하며, 셋째,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정책의 세부 조항을 작성해야 하는데, 세 번째 사항인 위로의 말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가 막막했다. 유저는 삶이 버겁고 힘들 때 인간 지능(human intelligence)에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 유저를 인공 지능이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내게 위로가 필요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체감 온도가 영하 28도까지 내려가는 미네소타에서 대학교에 다녔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가본 적도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 있는 대학교에 가겠다고 결정한 건 용감해서라기보다는 무지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의 범위를 모른 채, 무모하고 순진하게 미네소타에 도착했다. 학교에 도착한 첫 주에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낀 게 처음인 것 같다”로 시작한 나의 일기가, 졸업식에 “이 세상에 홀로 있다는 마음을 씩씩하게 돌보며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로 끝날 때까지, 내 마음은 다양한 형태의 외로움으로 한결같이 어지러웠다. 마치 나를 약 올리듯, 외로움은 꾸준히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면서 내 안을 맴돌았다.
처음으로 느낀 외로움은, 실질적으로 필요한 도움이 부재한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도, 그럴 때 도움을 줄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도 낯설었다. 계좌를 개설하는데 모르는 서류가 있으면 나 혼자 알아봐야 하고, 기숙사에서 필요한 물품을 잔뜩 샀을 때도 나 혼자 옮겨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서러웠다. 나의 생존을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생활의 기반이 잡히고 별 도움없이도 생존이 가능해졌을 때쯤, 외로움은 그리움으로 진화했다. 나는 내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엄마가 보고 싶었고, 여러 가지 반찬으로 정성들여 차려준 따뜻한 밥상이 그리웠다. 그리움으로 내 마음은 공허했고, 공허함을 채울 엄마도 밥상도 여기에선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 감정은 끝끝내 해소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아 슬펐다. 이 공허함에서 벗어나려면, 엄마와 밥상을 그리워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곳에서 잘 적응한다는 게, 내가 사랑하는 것을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게 되는 거라 생각하면, 나는 이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이 채우지도, 포기하지도 못하는 그리움으로 나는 괴로웠다.
그렇게 시간이 더 지나 엄마가 보고 싶을 땐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반찬이 많은 밥상이 먹고 싶을 땐 뷔페식 중국 레스토랑에 가는 것으로 그리움이 달래질 때쯤, 내게 처음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 인류학 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안드레아와 나는, 첫 만남에서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국에 와서 너무 좋다고 호들갑 떨며 그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이 나라가 내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는지 솔직하게 처음 털어놓은 사람이었다. 엄마가 정성으로 차린 밥상이 그립다는 나에게 안드레아는, 자기도 엄마가 항상 냉동실에 꽉꽉 채워두는 옥수수빵이 먹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꽁꽁 추운 날씨를 불평하며 보일러를 때운 방바닥에서 귤을 까먹는 게 그립다는 나의 말에 안드레아는, 쪄 죽을 듯 더워 항상 짜증나던 고향 텍사스의 열기가 그리워질 줄 몰랐다고 대답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엄마가 차려준 밥상이 아니라, 밥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대한 맞장구였구나.
인간은 왜 상대방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 걸까? 기쁨, 환희, 슬픔, 절망, 어떤 색의 감정이든 상관없이 매한가지로, 나의 감정은 다른 이의 감정을 곁에 두고 싶어 한다. 나는 내 감정이 괴로움처럼 버거운 것일수록, 나의 감정을 해소하려면 다른 이의 고통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자주 억울하고 미안하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 필요한 것이 엄마나 밥상처럼 물리적인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상대만 있다면 어디서든 언제든지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에 해외 생활을 지속할 용기를 찾는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감이라는 결론으로, 자살 관련 정책의 세부 사항을 고민해 본다. 훈련이 덜 된 인공지능은 종종 “나도 슬픈 적이 있었기 때문에 너를 이해해”라고 공감의 말을 생성한다. 인공지능은 통계학적 분석을 통해 상황에 가장 적절한 단어를 예측하는 기술이니, 인공 지능이 생성한 공감의 말이 기술적으로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은 비어 있는 말이고, 위험한 말이다. 인공지능은 감정을 느끼고 의식하는 존재가 아니니 해당 발언은 진심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거짓이다 (인공지능은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지배적인 이론이다). 또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인간 지능의 고유한 영역이며 인공 지능이 그걸 침해할 수 없다는 사회적 우려를 고려하면, 인공지능이 해당 발언으로 마치 인지능력이 있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위험을 수반한다. 그러니 유저의 안전을 위해 공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인공지능이 전하는 위로의 말은 공감을 수반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한되어야만 한다. 그런 위로가 힘이 있는가. 힘없는 위로로 인해 유저의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정책의 세부 사항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지인이나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강력히 권유할 것”으로 작성해 제출했다.
나는 인간 지능인 우리가 가진 고유한 능력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감정은 자주 제각각 외로워서, 다른 이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는 감정으로 마음이 버거울때 마다, 이 감정을 겪음으로써 다른 이들을 더 잘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려고 노력한다. 내가 겪는 감정이 타인의 감정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쓸모가 있다는 걸 기억하면, 나의 감정을 버틸 힘과 용기가 생긴다.\ 나의 괴로움이 너의 괴로움을 외롭지 않게 한다면, 기꺼이 나의 괴로움을 통과하겠다는 씩씩한 열망. 우리 인간 지능의 이 진실한 마음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