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의 효용 / The Utility of Meltdowns

한가로운 일요일. 우리는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집안 곳곳에서 시들어가는 화분들을 대체할 새로운 화초를 사러 가기로 했다. 싱가포르야 일 년 내내 매일이 덥지만, 그날은 이른 아침인데도 아스팔트 위로 뜨거운 열기가 이글대는 유별나게 더 더운 날이었다. 브런치를 먹는 오티스는 더위 때문인지 평소보다 빨리 주스를 들이켰고, 그 속도에 맞춰 빵을 두배로 먹었다.
카페를 나서, 화초 가게로 가는 길. 화초 가게는 온 길을 되돌아 우리 집을 지나쳐, 반대 방향으로 15분 정도 더 걸어간 곳에 있다. 그래서 우선 집의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신기한 나뭇가지가 보였다. 시들어서 부러진 게 아니라, 싱싱하고 통통하게 직선으로 곧게 뻗은 멋들어진 나뭇가지였다. 나뭇가지를 집어 든 오티스는 그 끝에 나뭇잎을 꽂은 다음, 머리 위로 높게 들며 외쳤다.
“대장의 깃발을 따라오거라!”
뛰어가는 오티스를 행군 걸음으로 따라가는 나와, 오티스가 타고있던 킥보드를 들고 뒤따라오는 아만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아파트 근처에 도착했다. 집에 들러 간식을 챙길지 고민했지만, 아침을 잔뜩 먹은 오티스가 배고플 리 없다며 우리는 바로 화초 가게로 가기로 했다. 아만다는 짐이 많을텐니 나뭇가지를 대신 들어줄 수 없을거라며 나뭇가지를 경비실에 맡겨두고 가자고했고, 오티스도 순순히 동의했다.
"이건 아주 소중한 나뭇가지예요, 잘 부탁합니다!"
경비아저씨께 각별한 부탁을 남기고, 우리는 화초 가게로 향했다.
땡볕을 걸어 도착한 화초 가게. 간이 천막을 쳐서 야외에 조성된 가게에서 열대 나무들은 깊은 초록색을 띠며 최고의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지만, 장렬한 태양 빛에 익어버린 우리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내 방에 둘 화초를 골랐을 즈음에, 저쪽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앙!!!"
이국적인 열대 식물을 지나, 각양각색의 선인장을 지나, 향긋함이 뒤섞인 허브를 지나.
"얼른 집에 가고싶어!!"
색색이 핀 장미를 지나, 키 큰 해바라기를 지나, 천장에 매달려 자라는 화초를 지나.
바닥에 널브러져 울고 있는 오티스가 보였다. 땀과 눈물과 콧물이 섞여 끈적해진 얼굴. 백인의 피부는 햇빛을 받으면 빨갛게 익는데, 화까지 겹친 오티스의 얼굴은 짙은 붉은색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내가 재빨리 계산대로 가서 아만다가 이미 골라둔 화분과 내가 고른 화분을 결제한다. 아만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오티스를 겨우 일으켜 출구로 끌고 간다. 문 앞에서 킥보드를 타고 총알처럼 튀어 나가려는 오티스를, 아만다는 겨우 붙잡아 헬멧을 씌운다. 우는 아이를 데리고 집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겁이 나지만, 키가 큰 화초를 갖고 택시를 탈 수 없고, 버스를 타자니 정류장이 너무 멀다. 걸어가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 우리의 양손엔 거대한 화초가 들려 있고, 정오의 햇볕은 더 뜨거워져 있다.
예상한 대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티스가 다시 떼를 쓰기 시작한다.
“집에 언제 도착하는 거야!”
누가 먼저 저기 있는 건널목에 도착하는지 시합하자고 관심을 끌어본다. 화분을 양손에 들고 뒤뚱뒤뚱 걷는 나를, 오티스가 쉽게 앞서 나가는 듯하다가, 되돌아서 우릴 보며 또 울기 시작한다.
“배고파! 간식 주세요!”
울음을 그치고 얼른 집에 가야 밥을 먹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합리적으로 설명해 본다.
건널목 한 개를 건너고, 터진 울음을 달래고. 또 다음 건널목을 건너고, 또다시 터진 울음을 달래고. 끝없이 이어지는 성지순례길. 화초 가게가 이렇게 멀리 있었나.
“다리 아프단 말이야! 안아 줘!”
끝내 두 팔을 벌리고 주저앉은 오티스. 결국 허리춤까지 올라는 화초가 든 비닐봉지를 각자 손목에 끼우고, 나는 킥보드를, 아만다는 오티스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이제 아만다의 품속에서 오티스가 새로운 이유로 울기 시작한다.
"경비아저씨가 내 나뭇가지를 잃어버렸어!”
“나뭇가지가 없어졌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의 가정을 질문해 본다.
“나뭇가지가 없어졌을 리 없어, 얼른 가자” 그의 현실을 부정해 본다.
“나뭇가지가 없어졌으니 얼른 집으로 가서 찾아보자” 너의 말이 옳다는 공감이 혹시나 위로될까 봐, 말이 안 되는 주장에 공감해 본다.
자기만의 상상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통곡하는 아이를 달래려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날씨는 덥고, 손은 무겁고, 오티스는 우느라, 우리는 울음을 달래느라 모두가 지친 순간. 오티스가 내 아이였다면 얼른 울음을 그치라고 혼을 냈을까.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여기에 놓고 가겠다고 겁을 줬을까. 뭐라도 좀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만다를 보니, 아만다는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며 머리 위로 뿜어져 나오는 짜증을 스스로 다스리고 있다. 아이의 짜증을 또 다른 짜증으로 받아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는 그녀. 훈육은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고쳐야 할 때 필요한 거지, 아이가 나를 짜증 나게 할 때 필요한게 아니라고 우리는 여러 차례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순간이 닥쳤을 때, 그렇게 합리적 사고를 실천할 인내심이 내게는 아직 없다. 울음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멀찌감치 앞서 나가 보지만, 다섯 걸음도 못가 마음이 쓰여 하는 수 없이 돌아보게 된다.
길었던 여정 끝에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오티스는 자신을 가지런히 기다리고 있는 나뭇가지와 드디어 상봉했다. 나뭇가지를 손에 넣었으니 분명 기뻐야 하는데, 오티스는 오히려 삐죽삐죽했다.
“으앙-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란 말이야!!”
결국 또다시 울어버렸다. 나뭇가지가 정말 그 자리에 없어서, 자신의 대성통곡이 옳았다고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너무도 무탈하게 가지런히 놓아진 나뭇가지를 보니 자신의 울음이 허무하고 민망해져 약이 올랐던 걸까.
세상이 떠나갈 듯 길거리를 채웠던 오티스의 통곡은, 집에 올라가자마자 뚝 멈추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점심을 먹는 오티스에게 나는 속으로 꿀밤을 한대 때려주었다.
오티스는 왜 울었던 걸까? 이렇게 쉽게 괜찮아질 것을 왜 그렇게 울었냐고 다그치고싶지만, 그걸 설명할 수 있을정도의 자각 능력이면 그정도로 울지도 않았을 거다. 오티스가 운건 실제로 나뭇가지가 없어졌다 생각해서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자기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 화초를 구경해야 하는 게 지루했을 수도 있고, 빵 하나로 배가 부르기엔 너무 커버려서 정말 배가 고팠을 수도 있고, 그냥 날이 너무 더워서 짜증이 났을 수도 있다. 집에 가고 싶은데 혼자선 어디도 갈 수 없다는 게 갑갑했을 수도 있고, 왜 이렇게 화가 차오르는지 본인의 뇌도 그 이유를 해독할 수 없어 답답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은 특정한 이유때문에 울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쌓인 순간에 뭐라도 해소하고 싶어 그냥 울어버린다. 이유가 먼저고 울음이 터진게 아니라, 울고싶은 마음이 먼저고 이유는 그저 자신의 마음을 납득시켜보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런 울음을 우는 오티스의 곁에, 지금 이 순간에 우는게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에 집중하기 보단, 마음을 먼저 진정시켜 주려는 아만다가 있다.
매일 자라나는 오티스를 보며, 나는 우리가 본래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이해하고 조절하는 능력은 우리가 갖고 태어나는 능력이 아니다. 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울면 다른 사람에게 번거로울 수 있다는 걸 수없이 경험하며, 우리는 울고 싶은 마음을 능숙하게 잠재우는 어른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른이니까, 내 마음을 잘 잠재우는 걸 넘어서, 어떤 감정은 아예 생기지도 않게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오티스의 울음이 보여주듯, 능숙하게 다뤄지기 전의 순도 높은 감정은 무척이나 강렬해서, 어른이 아니라 부처가 되어야만 그 파생을 완전히 다스릴 수 있다. 그렇게 성숙이란 명목 하에 없어질 수 없는걸 짓눌려야 하는 어른의 마음이 나는 기특하면서 가엾기도 했다.
새 화초를 들인 그 주는 마음이 무거운 때였다. 쏟아지는 일은 힘에 부쳤고, 은퇴를 앞둔 부모님이 걱정되었고, 좋아해서 좋을 게 없는 사람에게 생기는 마음이 버거웠다. 이건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이유일 뿐, 이외에 내가 자각하지도 못한 이유가 여럿 더 있었을 수도 있다. 오티스가 한순간에 이렇게 생글생글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마음껏 울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길고 긴 15분 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그의 야속한 울음이 가진 효용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 나도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울어버리고 싶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안아주는 품에서 한바탕 울고 나면 비로소 나아질 종류의 마음을 떠올리니, 나는 오티스가 조금 부러워졌다.